SK하이닉스에 처음 갔을 때 회의실 벽에 붙어 있던 문구가 하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.
당시에는 반도체 제조가 원래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. 이미 많이 최적화된 공정에서 아주 작은 차이를 찾아내고, 조건을 조금씩 바꿔가며 더 나은 결과를 만듭니다. 말 그대로 마른 걸레를 계속 짜는 일에 가깝습니다.
반도체 제조는 실제로 그렇게 발전해왔습니다. 뭔가를 한 번에 크게 바꾸기보다는 수많은 엔지니어가 작은 차이를 끝까지 파고들면서 성능과 수율을 조금씩 올립니다.
제조업과 소프트웨어의 차이는 지식이 쌓이는 방식입니다
요즘 CRM이나 마케팅 소프트웨어를 보다 보면 이상하게 그 문구가 자주 생각납니다. 고객에게 언제 다시 연락할지, 어떤 반응이 나오면 다음 단계로 넘길지, 어떤 메시지가 조금 더 잘 먹히는지까지 사소해 보이는 부분을 계속 쪼개고 개선합니다.
처음에는 ‘저걸 저렇게까지 하나’ 싶습니다. 그런데 생각해보면 반도체 제조도 비슷합니다. 웬만한 건 이미 다 잘하고 있으니 결국 작은 차이를 끝까지 찾아내는 쪽이 조금씩 앞서갑니다.
CRM에서는 잘 먹힌 방법이 제품의 기능이나 workflow로 들어갑니다. 한 회사에서 발견한 작은 개선을 다른 회사도 쓰고, 거기서 나온 경험이 다시 제품에 반영됩니다. 반복되는 문제를 여러 회사가 함께 풀면서 소프트웨어 자체가 점점 더 많은 방법을 담게 됩니다.
제조업에서는 이런 일이 훨씬 로컬하게 일어납니다.
특정 공장의 특정 장비에서 문제가 생기면 몇 명의 엔지니어가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원인을 찾습니다. 조건을 바꿔보고 결과를 확인하면서 결국 더 나은 방법을 찾아냅니다. 그렇게 어렵게 얻은 지식이 그 사람의 경험이나 엑셀, 보고서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.
비슷한 문제가 다른 장비나 다른 공정에서 생기면 또 다른 사람이 상당 부분을 다시 풀어야 합니다.
그래서 제조업의
learning rate가 중요합니다
생산성은 한 사람이 한 문제를 얼마나 빨리 해결하느냐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. 한 번 문제를 풀고 난 뒤 다음 사람이 얼마나 앞에서 출발할 수 있는지도 중요합니다.
좋은 판단이 반복 가능한 방식으로 남고, 다른 장비와 공정에서도 다시 참고할 수 있다면 문제를 풀 때마다 조직의 출발점이 조금씩 앞으로 이동합니다. 반대로 해결 과정이 사람과 문서에 흩어져 있으면 비슷한 문제를 만날 때마다 다시 데이터를 모으고, 다시 가설을 세우고, 다시 검증해야 합니다.
제조업이 이미 ‘마지막 한 톨’까지 개선하는 산업이라면 이런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질 수 있습니다.
AI가 제조 현장에서 더 많은 판단을 맡으려면 과거 데이터만 많이 모으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.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보고, 어떤 판단을 했고, 그 결과가 어땠는지까지 이어져야 다음 판단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.
그래서 제조 소프트웨어에는 분석 결과뿐 아니라 문제를 푼 과정도 남아야 합니다. 엔지니어가 한 번 만든 방법이 다음 공정과 장비에서 다시 출발점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.
한 번 짜낸 한 톨을 다시 짜지 않는 것
반도체 제조는 이미 마지막 한 톨까지 짜면서 발전해온 산업입니다. 더 작은 차이를 찾아내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.
다만 다음 생산성 차이는 더 세게 짜는 데서만 나오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.
Amously가 제조 소프트웨어를 만들면서 중요하게 보는 것도 이 부분입니다. 공정마다 답을 하나씩 대신 만들어주는 것보다, 엔지니어가 문제를 풀고 운영하며 얻은 지식이 남아서 다음 문제에 다시 쓰이는 편이 제조업의 learning rate를 더 높일 수 있다고 봅니다.